2026년 연구원의 새로운 회원으로 오신 정영호 대표님의 시가 수록되어 공유드립니다.
흐름은 스스로 길을 만든다
나는 한때 길을 믿었다.
세상에는 보이지 않더라도 분명한 방향이 있고, 그 방향을 따라가면 언젠가 도착할 수 있다고 믿었다. 그 믿음은 의심해 본 적이 없는 전제와 같았다.
젊은 시절의 나는 멈추지 않았다.
멈추지 않는 것이 곧 살아가는 방식이라고 여겼다. 밤늦도록 불이 꺼지지 않는 회의 실, 쉼 없이 이어지는 결정과 판단들, 빠르게 흘러가는 말들 속에서 나는 나름의 자 리를 확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. 누군가는 목소리를 높였고, 누군가는 침묵으로 버텼 다. 나는 그 사이에서 적절한 표정을 찾고 있었다. 말보다 표정이 더 많은 것을 결정 하는 순간들이 있었고, 나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.
빛은 분명히 있었다.
그러나 그 빛은 따뜻하지 않았다.
어떤 순간들은 분명히 빛났지만, 오래 머물지 않았다. 지나간 빛의 자리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공허가 남았다. 손에 쥔 것 같았던 것들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느낌이 었다. 나는 그 공허를 지우기 위해 더 빠르게 움직였다. 속도가 나를 지켜줄 것이라 고 믿었다. 속도를 잃는 순간, 모든 것이 무너질 것만 같았다.
그러던 어느 날, 멈췄다.
정확히 말하면, 내가 멈춘 것이 아니라 멈춰졌다.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자 리에서,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. 처음으로 ‘할 수 없음’이라는 상태에 머물렀다. 그제야 알았다. 사람은 스스로 멈추지 못할 때, 그렇게 멈춰지기도 한다는 것을.
나는 그 자리에 오래 서 있었다.
시간은 흐르고 있었지만, 나에게는 흐르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. 다음이라는 말이 사 라진 시간이었다. 무엇을 해야 할지,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. 그동안 나는 늘 다음을 향해 살아왔는데, 그날 이후로는 ‘다음’이라는 말 자체가 낯설어졌다.
그때, 문장 하나가 떠올랐다.
쉼을 얻기 전까지는 쉴 수 없다는 말.
그 문장은 어디선가 들은 기억이 아니라,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내 안에 스 며들었다. 나는 그제야 생각했다. 길을 잃은 것이 아니라, 다른 방향으로 너무 오래 걸어온 것은 아니었을까. 멈춤은 실패가 아니라, 방향을 묻는 질문일지도 모른다고. 그래서 떠났다.
멀리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, 더 이상 같은 자리에 머물 수 없어서였다.
낯선 도시의 작은 방.
그곳에는 나를 아는 사람이 없었고, 내가 설명해야 할 관계도 없었다. 하루의 대부분 은 침묵으로 채워졌다. 그곳에서 나는 자주 울었다.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었다. 설명하려고 하면 사라지고, 받아들이면 흐르는 눈물. 다만 울고 나면, 무언가가 조금 씩 비워지는 느낌이 들었다.창문 밖으로는 낯선 도시의 불빛이 이어져 있었다.
그 불빛들은 나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. 수많은 사람들의 삶이 그 안에서 이어지고 있었지만, 나는 그 흐름 바깥에 서 있는 사람 같았다. 불을 끄지 못한 채 한참을 앉아 있는 밤들이 이어졌다.
비워진 자리에는 이전과 다른 감각이 남았다.
무언가를 채우려 애쓰지 않아도 되는 상태,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. 그 낯선 감 각 속에서 나는 조금씩 나 자신과 마주하기 시작했다.
어느 날이었다.
아무도 없는 시간, 아무 말도 없는 공간에서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스쳤다. 그것은 소 리라기보다 가까웠고, 생각이라기보다 분명했다. 어떤 확신처럼 스며들었지만, 붙잡으 려 하면 사라질 것 같았다. 나는 그것을 붙들지 않았다. 다만 그 이후로, 혼자라는 느 낌이 조금 옅어졌다는 사실만 남았다.
길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.
그러나 이상하게도, 더 이상 조급하지 않았다. 길이 없다고 생각했던 자리에서 오히려 무언가가 천천히 드러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.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곧 없는 것 은 아니라는 사실을, 그때 비로소 이해하기 시작했다.
나는 조금씩 알게 되었다.
길은 한 번에 보이지 않는다. 걸어갈 때, 그때마다 드러난다.
그 이후로도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.
여전히 선택해야 했고, 여전히 흔들렸으며, 때로는 다시 길을 잃은 것처럼 느껴졌다. 확신은 자주 사라졌고, 질문은 더 많아졌다.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히 달라졌다.
나는 더 이상 길을 증명하려 하지 않는다.
누군가에게 설명하기 위해, 혹은 스스로를 납득시키기 위해 길을 만들려 하지 않는다. 대신, 걷는다.
돌아보면 내가 걸어온 길은 곧지 않았다.
여러 번 돌아갔고, 때로는 제자리로 돌아온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. 어떤 시간들은 낭비처럼 보였고, 어떤 선택들은 후회로 남기도 했다. 그러나 그 모든 시간들이 완전 히 흩어진 것은 아니었다. 보이지 않는 흐름 속에서, 그것들은 하나의 방향으로 이어 지고 있었다.
무너졌던 시간도,
멈춰 섰던 순간도,
이유 없이 흘렸던 눈물도.
사라진 것은 없었다.
지금도 나는 길 위에 있다.
여전히 흔들리고, 여전히 모자라다. 때로는 다시 불안해지고, 다시 조급해지기도 한 다. 그러나 이제는 안다.
길을 잃는 순간에도, 길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.그래서 오늘도 걷는다.
보이지 않아도,
설명할 수 없어도.
걸어가는 그 자체로, 길은 조금씩 드러난다. -끝-
수필 공모_작가의 구상
이 글은 한 개인이 삶의 방향을 상실하고 멈춰 서게 된 이후, 외부의 해답이 아닌 내 면의 감각과 시간을 통해 다시 ‘걷게 되는 과정’을 담고자 한 작품입니다. 특정한 사 건이나 결론을 중심에 두기보다, 멈춤과 고립의 시간을 통과하며 서서히 드러나는 감 정과 인식의 변화를 따라가고자 했습니다.
특히 ‘길’이라는 익숙한 개념을 통해,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왔던 방향성과 확신이 흔 들리는 순간을 포착하고, 그 이후에 형성되는 미묘한 감각의 변화를 최대한 절제된 문장으로 담아내고자 했습니다. 설명을 덜어내고 장면과 여백을 남기는 방식으로, 독 자가 각자의 경험 속에서 이 글을 다시 읽어갈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.
부족한 글이지만, 귀한 검토를 부탁드립니다. 감사합니다.


